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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토요일 밤마다 텔레비전 채널을 KBS-2로 틀어두고 영화를 보던 기억이 있으신지요.
지금은 사라진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토요명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참고 링크 :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해당 항목) 토요일 밤마다 좋은 영화를 더빙 송출하던 프로그램이었지요.
1980년 연말 무렵 <주말을 명화와>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81년 9월 「토요명화」라는 제목으로 개명하였고, 이후 20년 이상 시청률 3~40%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2003년 이후 시청률이 대폭 감소했고, 2005년 1월 1일부터는 TV연속극 「겨울연가」 재방송에 방영시간을 내주며 갑작스레 종방하였습니다. 시청자들의 항의에 힘입어 2005년 4월 2일부터 방영이 재개되었으나 시청률은 다시 오르지 못했다고 하지요. 이후 방송가에서 프로그램을 고사시키는 흔한 방식대로방영시각이 22시에서 23시로, 다시 24시로 옮겨지더니 24시 35분에야 방영을 시작하던 2007년 11월 3일자 1 방송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종방되고 말았습니다.
1년이 52주니까 방영기간을 대략 25년으로 잡고, 재방영된 영화를 대략 2~30% 정도로 잡으면 약 1,000여편에 달하는 영화가 방영된 셈입니다.
그 다양한 영화를 모두 기억하긴 어렵지만, '토요명화'의 오프닝 시그널 뮤직만은 많은 분께서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토요명화 시그널
KBS-1의 「명화극장」 오프닝 시그널(들어보기)과 더불어 한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 곡은 스페인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호아킨 로드리고(Joaquin Rodrigo, 1901~1999)가 1939년에 작곡한 '아랑후에스 협주곡(Concierto de Aranjuez)의 일부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 이 오프닝 시그널에서 쓰인 것은 베르너 뮐러(Werner Muller)가 편곡한 판이라고 하네요.
원래의 아랑후에스 협주곡은 이런 곡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부분은 7분 23초 경부터 나옵니다.)
아랑후에스 협주곡
워낙 명곡인만큼 여러 곳에서 인용, 재창조되었는데, 그 사례중 하나가 「이노센스」의 엔딩곡 'Follow me'일 것입니다.
「이노센스」는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2004년에 발표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서,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공각기동대」의 후속작입니다. 극장판 공각기동대 시리즈의 음악이라면 오키나와 전통가곡을 현대적으로 재창작한 '꼭두각시 노래 - 원한을 남기고 지다 (傀儡謡-怨恨みて散る)' 등의 넘버가 유명합니다만, 「이노센스」의 OST에는 두 곡의 재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곡은 작중 바토가 자신의 안전가옥에서 애완견과 함께 휴식을 취할 때 흘러나오는 'River of Crystals'(OST 4번 트랙)이고, 다른 한 곡은 엔딩 테마곡인 'Follow me'(OST 12번 트랙) 입니다.
'꼭두각시 노래 - 원한을 남기고 지다(傀儡謡-怨恨みて散る)'의 일부가 배경으로 깔린 「이노센스」의 한 장면
※ 주의 : 약간의 고어한 묘사와 스토리 누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들으면 알 수 있다시피 아랑후에스 협주곡 2악장의 주요 멜로디를 보컬라인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 곡을 부른 이토 키미코(伊藤君子, 1946~)는 세계의 다양한 음악을 재즈풍으로 리메이크해 부른 경력이 있는 일본의 재즈보컬로서, Follow me를 자신의 1989년 앨범에 수록한 바 있습니다. 3 미국과 일본에서 발매된 이 이 앨범은, 미국의 Radio & Records지에서 컨템포러리 재즈 부문 16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토 키미코의 Follow me가 리메이크곡이니 그 원곡도 따로 있겠지요. 본디 아랑후에스 협주곡에 가사를 달고 Follow me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그리스의 가수 데미스 루소스(Demis Roussos, 1946~2015, 위키백과 링크)와 작곡가 반젤리스(Vangelis, 1943~, 위키백과 링크)입니다. 1982년 싱글로 발매한 이 곡은, 당시 기록을 보면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차트에 오르는 등 어느 정도 반향이 있었던 듯 보입니다.
'불후不朽'라는 단어가 있지요. 불후의 명작, 불후의 명곡 하는 식으로 쓰이는 이 '불후'라는 말은 한자 그대로 '썩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만물은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언젠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또한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도 살아있는 이상 언젠가는 그 목숨이 다하기 마련이지만, 위대한 예술작품만큼은 지역과 시대를 넘어 새 시대의 사람들에게 옛되면서도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나기를 거듭하게 되기에 그런 말이 생겨난 것이겠지요. 본 포스트에서 다룬 것과 같이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들려져온 '아랑후에스 협주곡' 또한 그런 불후의 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토 키미코 개인앨범 버전의 Follow me와 데미스 루소스의 Follow me 영상을 덧붙이며 포스트를 마칩니다.
이토 키미코 89년 앨범 수록판 Follow me
데미스 루소스와 반젤리스의 Follow me
글 닫는 여담 : 「토요명화」와 비슷한 역할을 해왔던 KBS-1의 프로그램 「명화극장」마저도 2014년 12월 26일자를 마지막으로 종영되었습니다. 공영방송이 시청률 저조를 이유로 이런 프로그램들을 종영하는 게 바람직한 일인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공중파 텔레비전을 통해 한국어 더빙 영화를 볼 기회는 거의 사라진 셈인데, 더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막 이용에 불편을 겪는 사람들 4을 외면하는 것이 과연 '공영'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일일까요. 그러는 와중에도 그들은 IPTV의 수신료 이중부과 문제조차 외면한 채 TV수신료 인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 24시를 넘겨서 시작하는 방송이니 정확히는 11월 4일이었지요. (본격 일요일에 시작하는 토요명화.) [본문으로]
- 이토 키미코가 부른 이노센스 OST 버전은 저작권 문제로 유튜브에 올라와있지 않습니다. (유튜브 검색에 이노센스 버전이라 나오는 곡들은 대부분 이토 키미코 개인 앨범에 수록된 버전들입니다.) [본문으로]
- 한국에서 이노센스의 OST 앨범이 발매되었던 당시, 초회한정판에는 이 이토 키미코 89년 버전을 재녹음한 Follow me가 담긴 미니CD를 함께 증정하기도 했습니다. [본문으로]
- 시각장애인들에게도 더빙은 필요하고, 수많은 문맹자들이나 한국어에 덜 익숙해 글보다 말이 편한 외래인들, 그리고 장애로 분류되지 않지만 노안으로 인해 작은 글씨를 보기 불편한 연령층 등 더빙이 필요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본문으로]